[뉴스레터][내일의식탁 현장취재 02] 발효는 기다림이 아니라 설계다


발효는 기다림이 아니라 설계다


밍추 컬리너리 개더링에서 다시 생각한 한국 발효의 가능성


글 김원일 · 내일의식탁 이사장
2026년 9월 14일 · 한식문화공간 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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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효는 기다림이 아닌 설계다.”

9월 14일 한식문화공간 이음에서 열린 첫 번째 MINGCHU Culinary Gathering의 제목이다. 정혜민 셰프와 발효 디렉터 제이슨 이그나시오 화이트(Jason Ignacio White)가 각각 자신의 R&D 경험을 이야기하고, 이어 두 사람이 함께 질문을 받았다.

나는 이날 객석에 앉아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금 다른 생각을 했다. 두 발표자는 내게 낯선 연사가 아니다. 지난 몇 달 동안 함께 생산자를 찾아다니고, 질문을 나누고, 새로운 연구의 방향을 의논해온 사람들이다. 그래서 무대 위에서 짧게 지나간 한 문장 뒤에 어떤 현장과 대화가 있었는지 알고 있었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이날 내게 가장 크게 남은 것은 ‘발효를 어떻게 잘할 것인가’에 대한 기술적인 설명이 아니었다. 우리는 한국 발효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오래된 지식을 다음 세대로 어떻게 넘길 것인가, 그리고 R&D는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었다.

발효는 분명 기다림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기다린다고 모두 좋은 발효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을 읽고, 재료를 이해하고, 원하는 맛을 생각하고, 미생물이 움직일 환경을 만들고, 그 결과를 다시 관찰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날의 ‘설계’라는 말은 자연을 통제한다는 뜻과는 오히려 거리가 멀었다.

발효의 설계는 자연을 이기는 기술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일하기 위해 더 자세히 관찰하는 태도에 가까웠다.


왜 제이슨 화이트는 지금 한국에 있을까

제이슨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이 배경부터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세계 여러 나라의 레스토랑과 농촌, 생산현장을 다니며 R&D를 해온 미국인 발효 연구자가 왜 지금 한국에 살고 있을까.

제이슨은 자신을 ‘creative scientist’라고 부른다. 요리와 발효만을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농업, 미생물, 재료와 기술을 넘나들며 질문을 발견하고, 창의적인 방법으로 해답을 찾아가는 연구자라는 의미다. 그의 경력 대부분이 R&D였다.

한때 그 연구의 무대는 세계적인 파인다이닝과 첨단 주방이었다. 주방 안에서 대체육을 연구하고, 미생물로 색과 질감을 만들고, 토양과 작물의 관계까지 실험했다. 그는 그 시절을 ‘매일 새로운 산을 오르는 것 같았다’고 회상한다.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고, 그것을 실제로 시험해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려한 R&D의 한복판에서 오히려 질문이 생겼다. 몇 년 동안 한 가지 맛을 연구해도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이 하루 40명이라면, 자신이 가진 창의성과 연구 역량을 더 넓게 사용할 방법은 없을까.

그는 산속 농장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발효와 저장은 유행이나 취미가 아니라 살아가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현대적인 주방에서 일해도 ‘마음속의 발은 늘 흙을 밟고 있었다’고 했다.

레스토랑을 떠난 뒤 제이슨은 세계의 농촌으로 들어갔다. 필리핀의 해조류 생산자, 히말라야 지역의 공동체, 아프리카와 중동의 농업 현장 등에서 사람들과 함께 일했다. 그곳에서 그는 음식의 문제가 한 접시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보게 되었다.

기후가 달라지면 작물이 사라진다. 가업을 이어갈 자녀가 떠나면 몇 세대 동안 이어진 기술이 한 세대 만에 끊길 수 있다. 생산자에게 필요한 것은 돈과 장비만이 아니라 새로운 지식과 교육, 그리고 변화한 조건에서 다시 길을 찾을 수 있는 창의성일 수 있다.

그때부터 제이슨의 R&D는 ‘무엇을 새롭게 만들까’보다 ‘이 공동체가 가진 문제를 함께 어떻게 풀까’에 가까워졌다. 밍추에서 그가 ‘community-driven research and development’라는 표현을 반복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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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2월, 한국 발효를 보여주기 위한 첫 여행

제이슨이 처음 한국에 온 것은 2026년 2월 18일이었다. 나이로비에서 서울로 들어와 3월 9일 LA로 떠나는 3주 남짓한 일정이었다.

나는 그 짧은 시간에 가능한 한 다양한 한국 발효를 보여주고 싶었다. 장과 김치처럼 이미 이름이 알려진 결과물만 보여주기보다, 그 맛을 만들어온 사람과 장소, 농업과 계절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2026 K-Fermentation Expedition’을 기획해 직접 제이슨을 안내했다. 서울의 경동시장과 사직단에서 시작해 태안의 자염과 바다, 지역의 장과 메주, 술과 누룩을 만드는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이동하는 시간보다 사람을 만나 질문하는 시간이 더 중요했다.

제이슨은 가는 곳마다 ‘왜?’라고 물었다. 왜 이 지역의 장은 이런 맛이 나는지, 왜 이런 모양의 메주를 만드는지, 왜 이 소금을 쓰는지, 예전에도 그랬는지, 지금도 꼭 그렇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그런데 그의 질문은 전통을 부정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오래된 방법 속에 숨어 있는 이유를 찾으려는 질문이었다. ‘원래 이렇게 해왔으니까’라는 대답에서 멈추지 않고, 그 방법이 어떤 자연조건과 생활의 필요 속에서 생겼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

짧은 여행이 끝날 무렵 제이슨은 한국을 다시 오고 싶다고 했다. 단지 한국 음식을 더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세계를 다니며 보아온 여러 발효문화와 비교했을 때, 한국에는 아직 하나의 정답으로 정리되지 않은 다양성과 살아 있는 실험성이 있다고 느낀 듯했다.

그는 한국을 홈베이스로 삼아 국제적인 발효 활동을 이어가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내일의식탁과 주변의 여러 사람들이 그 가능성을 현실로 만드는 데 힘을 보탰고, 5월 27일 제이슨은 다시 한국에 들어왔다. 지금은 2년 일정으로 한국에 머물며 연구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정혜민 셰프와 함께 MAK R&D 팀을 이루었다. 두 사람은 이제 행사에서 만나는 발표자가 아니라 실제 현장에서 함께 움직이는 동료다. 지역의 생산자를 만나 무엇을 이미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고, 무엇이 어려운지 듣고, 그 안에서 함께 연구할 질문을 찾는다.


내일의식탁을 ‘생산자에게 가는 길’로 본 사람

제이슨과 함께 다니며 흥미로웠던 것은 그가 내일의식탁을 바라보는 방식이었다.

그는 밍추에서 내일의식탁을 자신이 함께 일해본 비영리단체 가운데 매우 인상적인 곳이라고 소개했다. 무엇보다 한국 발효 생산자들과 깊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중요하게 보았다.

사실 내일의식탁이 지난 시간 동안 해온 일은 거창한 연구가 아니었다. 지역을 찾아가 사람을 만나고, 좋은 생산자를 발견하고, 그들이 만드는 것을 맛보고, 참발효어워즈와 교육, 행사와 기록을 통해 다시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제이슨과 다니다 보니 그 관계망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질문을 하나 던지면 그 질문과 연결되는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었다. 특정한 메주를 만드는 사람, 오래된 소금을 만드는 사람, 지역의 곡물로 술을 빚는 사람, 같은 제품을 몇 세대째 만들면서도 여전히 실험하는 사람이 있었다.

제이슨에게 이것은 단순한 ‘생산자 리스트’가 아니었다. 살아 있는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네트워크였다.

나는 이 지점에서 내일의식탁이 그동안 쌓아온 자산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 우리는 제품을 수집해온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왔고, 사람을 만나면서 그 사람의 손과 기억에 남아 있는 지식을 함께 만나왔다.

내일의식탁은 앞으로도 공익적인 영역에서 이 사람과 지역을 연결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MAK R&D는 그 연결에서 발견한 질문을 실제 실험과 제품, 새로운 사용법으로 발전시키며 지속가능한 연구의 기반을 만들고자 한다. 공익적인 네트워크와 전문적인 R&D가 서로의 역할을 대신하지 않으면서 연결되는 구조다.


“왜 메주는 겨울에만 만들어야 하죠?”

제이슨의 질문이 실제 프로그램으로 발전한 대표적인 사례가 여름메주였다.

한국에 와서 메주를 배우던 제이슨은 계속 같은 질문을 했다. “왜 메주는 겨울에만 만듭니까?” 여름은 덥고 미생물 활동이 활발하기 때문에 메주를 만들기 어렵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러자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옛날에도 정말 여름에는 만들지 않았습니까?”

이 질문은 단순하지만 꽤 근본적이었다. 지금 우리가 ‘전통’이라고 부르는 방식이 과거의 모든 방식인지, 아니면 여러 방법 가운데 특정한 방식만 살아남은 것인지 다시 살펴보게 했다.

나는 이 질문을 그냥 대화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내일의식탁이 알고 있는 생산자들과 자료를 연결해 실제로 여름메주를 함께 만들어보고 배우는 워크숍을 제안했다. 관련 경험을 가진 생산자들을 섭외했고, 서로 다른 지역과 사람에게 흩어져 있던 여름메주의 기억과 방법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 자리에서는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하는 겨울의 큰 메주와 다른 형태와 재료, 다른 건조와 열의 사용법을 만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여름에도 메주가 있었다’는 사실을 하나 더 추가하는 것이 아니었다.

여름에는 겨울과 온도가 다르다. 습도도 다르고 햇빛도 다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메주의 크기와 모양, 건조 방법, 열을 쓰는 방식을 어떻게 달리했을까. 그 차이를 보면 옛사람들이 발효를 단순히 기다린 것이 아니라 자연조건을 읽으며 계속 조정했다는 사실이 보인다.

제이슨은 그 지혜를 설명하며 말했다. 


“They worked with the planet, not against it.”

자연과 싸우지 않고 자연과 함께 일했다.


나는 이 문장이 ‘발효는 기다림이 아닌 설계다’라는 제목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열쇠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여름에는 메주를 만들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여름에 만들기 위해 다른 방법을 찾아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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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발효는 왜 제이슨에게 특별했을까

제이슨은 일본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발효문화를 오래 보아왔다. 그에게 한국이 흥미로운 이유는 한국 발효가 ‘더 우수해서’가 아니다. 아직 살아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의 생산자들을 만나면서 나이나 경력과 관계없이 계속 무언가를 시험하는 모습을 흥미롭게 보았다. 이미 훌륭한 장을 만드는 사람도 새로운 메주를 만들어보고, 다른 곡물을 써보고, 실패한 것을 다시 들여다본다.

제이슨은 ‘마스터’라는 말을 완성된 사람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오래 해온 사람일수록 다시 학생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내가 여러 생산자를 만나며 느낀 것과도 닮아 있다. 좋은 생산자는 자신의 경험을 믿지만, 경험 때문에 질문을 멈추지는 않는다.

한국 발효의 다양성도 그에게는 중요한 자산이다. 같은 장이라고 해도 지역과 집, 원료와 계절, 만든 사람에 따라 맛이 다르다. 산업의 관점에서는 이 차이가 불편할 수 있다. 레스토랑도 매번 같은 맛을 원한다. 하지만 문화의 관점에서는 바로 그 차이가 한국 발효의 정체성일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의 R&D는 이 다양성을 하나의 표준으로 없애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무엇이 달랐고 왜 달라졌는지를 이해하고, 필요할 때는 재현할 수 있게 만드는 쪽에 가까워야 한다.

‘다양성이 규칙’인 발효를 어떻게 기록하고 연구할 것인가. 나는 이것이 앞으로 제이슨과 정혜민, MAK, 내일의식탁이 함께 풀어가야 할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정혜민 셰프가 묻는 것: 전통을 어떻게 오늘의 식탁에 올릴 것인가

정혜민 셰프의 이야기는 제이슨과 다른 곳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같은 방향으로 향한다.

정 셰프는 오랫동안 레스토랑의 R&D 현장에서 한국 음식의 맛을 연구했다. 누룩과 메주, 식초뿐 아니라 버터와 유제품까지 연구했다. 서양의 버터와 오일이 음식에 풍미를 더하면서도 때로는 한국적인 맛을 덮는다면,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역할을 하는 재료를 우리 방식으로 만들어볼 수 없을까’라고 질문했다.

그에게 R&D는 새로운 것만 만드는 일이 아니다. 없는 것을 만들고, 잊힌 것을 다시 꺼내고, 없어져서는 안 될 것을 오늘의 방식으로 다시 쓰이게 하는 일이다.

이날 특히 마음에 남은 것은 전통을 정의하는 일보다 전통이 계속 이어지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이었다.

오래된 식재료가 아무리 문화적으로 중요해도 아무도 찾지 않으면 생산자는 만들 수 없다. 좋은 장을 만들어도 사람들이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면 냉장고 안에서 오래 머문다. 그렇다면 문제는 전통의 가치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늘의 식탁과 연결되는 사용법이 부족해서일 수 있다.

정 셰프가 파인다이닝의 한 접시에서 지역 생산자와 일상의 식탁으로 R&D의 무대를 넓히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셰프는 생산자의 맛을 대신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생산자가 가진 맛을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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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가 나왔으니 락토 발효를 해볼까?”

정혜민 셰프가 이날 한 말 가운데 ‘설계’의 의미를 가장 명료하게 보여준 대목이 있다.

발효가 유행하면서 셰프나 바텐더가 새로운 재료를 보면 ‘이걸 발효해볼까?’라고 먼저 생각하기 쉽다. 복숭아 철이 되면 ‘복숭아가 나왔으니 락토 발효를 해볼까?’라고 생각하는 식이다.

정 셰프는 그 순서를 뒤집어야 한다고 했다.

먼저 만들고 싶은 맛을 생각한다. 이 음식에 어떤 산미가 필요한가, 단맛이 필요한가, 감칠맛이 필요한가, 마지막 한 방울의 액젓이 필요한가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맛을 만들기 위해 어떤 재료와 어떤 발효가 필요한지를 선택한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R&D의 방향을 완전히 바꾼다. 발효기법을 보여주기 위해 음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맛있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발효를 선택하게 되기 때문이다.

제이슨도 음료에 관한 질문을 받았을 때 바로 레시피를 제시하지 않았다. 어떤 계절인지, 무엇과 함께 마시는지, 어떤 바에서 내는지, 달고 신 것을 원하는지, 짭짤하고 감칠맛 있는 방향인지부터 물었다.

기술보다 목적이 먼저다. ‘무엇을 발효할 수 있을까?’보다 ‘왜 이것을 발효해야 할까?’가 먼저다.

원하는 맛 → 필요한 기능 → 재료 → 발효방법 → 양과 조건


질문이 많았던 이유

이날 질의응답이 흥미로웠던 것은 질문이 아주 구체적이었다는 점이다.

콤부차를 만들 때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식물과 나무 같은 재료를 음료에 사용할 때 향을 어떻게 뽑을지, 젓갈을 새롭게 만들고 싶은 셰프는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같은 질문이 이어졌다.

질문하는 사람들의 고민은 비슷했다. 발효를 해보고 싶은데 어디까지가 경험이고 어디서부터가 안전의 문제인지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

제이슨은 미생물의 환경을 만드는 일과 맛을 만드는 일을 함께 설명했다. 정혜민 셰프는 생산자마다 다른 염도와 공정, 계절의 조건을 이야기했다. 두 사람의 답을 들으면서 오히려 한 가지가 선명해졌다. 발효에는 한 줄짜리 정답이 없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정답이 하나 없다는 말과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말은 전혀 다르다. 어떤 재료를 썼고,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변했으며, 무엇이 맛있었고 무엇이 실패했는지를 기록해야 다음 질문으로 갈 수 있다.

한국 발효가 오랫동안 감각과 경험으로 이어져왔다면, 이제 그 감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설명 가능한 지식과 연결하는 일이 필요하다.


‘며느리도 모르는 비법’에서 Living Database로

한 참석자는 한국 발효의 지식이 너무 자주 ‘비법’으로 남는 문제를 이야기했다. ‘며느리도 모른다’는 말처럼 한 사람만 알고 있는 경험이 기록되지 않고 사라진다면 다음 사람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나는 이 질문이 이날의 기술적인 질문들보다 오히려 더 중요하게 들렸다.

생산자의 손맛을 숫자로 바꾸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손맛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몇 월에 만들었는지, 원료는 어디에서 왔는지, 메주는 얼마나 말랐는지, 냄새와 색은 언제 바뀌었는지, 어느 해의 장이 유난히 좋았는지, 실패한 항아리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남기는 것이다.

제이슨은 지금 이런 생각과 연결된 Living Database를 만들고 있다. 한국의 발효를 완성된 표준으로 정리하는 백과사전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생산자와 장소, 재료, 공정, 맛, 질문과 실험이 계속 추가되고 서로 연결되는 살아 있는 기록을 만들려는 시도다.

이 작업이 중요한 이유는 한국 발효의 다양성을 없애지 않고도 지식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야만 한다’고 하나의 방법을 정하는 대신 ‘이 사람은 이 장소에서 이렇게 했고 이런 결과가 나왔다’를 축적하면 차이가 데이터가 된다.

앞으로 2년 동안 제이슨과 정혜민 셰프가 전국을 다니며 만나는 생산자와 실험의 기록이 쌓이고, 내일의식탁이 지난 시간 동안 연결해온 사람들의 경험이 더해진다면 꽤 흥미로운 지도가 만들어질 수 있다.

2년 뒤에는 ‘며느리도 모르는 비법’이라는 말이 지금과는 조금 다르게 들렸으면 한다. 생산자의 고유한 기술과 권리를 존중하면서도, 다음 세대가 다시 질문하고 실험할 수 있는 지식은 더 많이 공유되는 문화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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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D는 제품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질문을 함께 푸는 일

제이슨과 정혜민 셰프가 MAK R&D 팀으로 생산자를 만날 때 가장 먼저 신제품 아이디어부터 꺼내지 않는 이유도 같다.

먼저 묻는다. 지금 이곳에 무엇이 있는가.

오래 숙성된 장, 팔리지 않는 간장, 실패했던 제품, 해마다 조금씩 다른 메주, 생산자가 기억하는 유난히 좋았던 한 해의 맛, 쓰지 않고 남아 있는 시설과 장비까지 모두 연구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다음 질문으로 간다. 왜 이것은 좋은가. 왜 이것은 아쉬운가. 이 생산자만의 특징은 무엇인가. 실제로 해결하고 싶은 문제는 무엇인가.

발효는 무엇이든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무엇을 만들 수 있나’라는 질문은 위험할 수 있다. 아이디어는 끝없이 나올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왜 이것을 만들어야 하는가’이다.

며칠 전 만포농산 정병우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다. 새로운 소스를 열 개 제안하기보다 이미 보유한 연도별 장과 메주, 쌈장과 고추장, 과거의 실패와 생산시설을 먼저 살펴보았다. 좋은 우연이 있었다면 왜 좋았는지 이해하고, 실패가 있었다면 버리기 전에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묻는 방식이다.

이런 R&D에서 생산자는 연구대상이 아니다. 자신의 재료와 장소를 가장 오래 경험한 공동 연구자다. MAK의 역할은 외부의 정답을 들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생산자의 경험과 다른 지역의 지식, 과학과 요리의 관점을 연결해 함께 질문을 푸는 데 있다.


한국을 홈베이스로 삼는다는 것

제이슨은 서울대 평창캠퍼스에서 자신을 ‘지구의 시민(citizen of Earth)’이라고 표현했다. 미국 텍사스에서 태어난 사람이 왜 한국을 위해 일하느냐는 질문에, 세계의 푸드시스템은 결국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 말은 한국 발효를 외국인의 시선으로 평가하겠다는 뜻과는 다르다. 오히려 세계 여러 지역에서 보고 배운 것을 한국의 생산자와 연결하고, 한국에서 배운 것을 다시 다른 지역의 문제와 연결하겠다는 의미에 가깝다.

한국을 홈베이스로 삼는다는 것도 그래서 중요하다. 짧게 방문해 신기한 재료를 보고 떠나는 방식으로는 계절이 바뀌면서 발효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알 수 없다. 한 생산자를 한 번 만나는 것만으로는 그 사람의 실패와 고민을 이해하기 어렵다.

2년이라는 시간은 겨울의 메주와 여름의 메주를 모두 보고, 지난해의 장과 올해의 장을 비교하고, 한 번의 실험이 실패하면 다음 계절에 다시 해볼 수 있는 시간이다.

제이슨이 한국에서 하고 싶다고 말한 것은 거대한 연구시설을 먼저 짓는 일이 아니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 배운 경험을 이곳의 사람들과 연결하고, 협업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만드는 일이다. 기계와 기술은 중요하지만 결국 그것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사람의 창의성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우리가 앞으로 기록해야 할 것

밍추 개더링을 나오며 나는 내일의식탁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다시 생각했다.

우리는 지난 시간 동안 좋은 생산자를 발견하고 연결하는 일을 해왔다. 참발효어워즈를 통해 제품을 맛보고 기록했고, 발효학교를 통해 생산자가 직접 자신의 지식을 나누게 했고, 지역을 다니며 서로 다른 장과 술과 식초를 만났다.

이제 그 관계를 R&D의 언어로도 연결할 때가 왔다.

생산자 → 장소 → 원료 → 미생물 → 공정 → 맛 → 사용법 → 제품 → 시장.

이 연결을 하나의 표준으로 만들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 다른 이유를 더 잘 보이게 하자는 것이다. 어느 지역의 물과 소금이 어떻게 다른지, 같은 콩을 사용해도 왜 맛이 달라지는지, 어떤 생산자는 왜 그 공정을 고집하는지, 소비자는 왜 좋은 장을 사놓고도 잘 쓰지 않는지까지 연결해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장의 위기도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좋은 장이 없어서가 아니라 좋은 장을 오늘의 사람이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르는 문제일 수도 있다. 전통을 지키는 일과 새로운 사용법을 만드는 일은 서로 반대가 아니다.

내일의식탁이 사람과 지식을 연결하고, MAK R&D가 작은 실험을 하고, 그 결과가 다시 생산자와 공동체로 돌아가는 순환을 만들 수 있다면 한국 발효의 R&D는 연구실 안에만 머물지 않을 것이다.

현장 → 질문 → 연결 → 실험 → 기록 → 공유 → 다시 현장


발효는 기다리는 일이 아니었다

행사 제목으로 돌아가본다. 발효는 정말 기다림이 아닌 설계일까.

나는 이제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발효에는 기다림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다.

옛사람들은 계절을 읽고 메주의 모양을 바꾸었고, 바람과 햇빛을 이용했고, 소금과 물의 양을 판단했다. 오늘의 생산자는 온도와 습도를 기록하고, 셰프는 원하는 맛에서 거꾸로 필요한 발효를 선택하며, 연구자는 실패한 결과까지 데이터로 남길 수 있다.

전통은 과거의 형식을 그대로 반복할 때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과 원료, 사람의 생활이 변할 때 그 안에 있던 원리를 이해하고 다시 적용할 수 있어야 살아 있는 전통이 된다.

제이슨이 여름메주를 보며 했던 말이 다시 떠오른다.


“They worked with the planet, not against it.”

자연과 싸우지 않고 자연과 함께 일했다.


어쩌면 한국 발효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정답 하나를 완성해놓은 문화가 아니라, 자연의 변화 속에서 계속 질문하고 조정하며 맛을 이어온 문화.

2026년 2월, 나는 제이슨에게 한국 발효를 보여주기 위해 길을 나섰다. 그 여행은 3주 만에 끝났지만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제이슨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 정혜민 셰프와 MAK R&D 팀을 이루어 생산자들을 만나고 있다. 내일의식탁은 그들이 더 많은 사람과 지식을 만날 수 있도록 길을 잇고 있다.

앞으로 2년 뒤 우리가 몇 개의 제품을 만들었는가보다 나는 다른 것이 더 궁금하다.

우리는 한국 발효에 대해 무엇을 새롭게 이해하게 될까. 지금은 한 사람의 손과 기억 속에만 있는 어떤 지식을 다음 사람에게 건넬 수 있을까. 생산자가 계속 만들 수 있는 새로운 이유를 몇 개나 발견하게 될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세계의 다른 지역 사람들이 한국 발효를 단지 장과 김치라는 제품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하나의 지식체계로 바라보게 될 수 있을까.

발효는 기다리는 일이었다. 동시에 질문하는 일이었고, 관찰하는 일이었으며, 관계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기다림을 기록하고 연결하고 다음 질문으로 이어가는 일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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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MINGCHU Culinary Gathering: 발효는 기다림이 아니라 설계다(2026.09.18, MINGCHU 온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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