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식탁 너머 #02] 냉장고에서 음식을 구하라

냉장고에서 음식을 구하라


류지현 작가와 함께 생각한 ‘버리지 않는 부엌’


글 유다샘  ·  굿푸드랩 대표, 퍼멘터즈 편집장
2026년 9월 17일  ·  막MAK 서울


우리는 음식을 사면 자연스럽게 냉장고로 가져갑니다.

채소도 냉장고, 과일도 냉장고, 계란도 냉장고. 먹다 남은 음식도 냉장고에 넣어둡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냉장고 안에서 애호박 하나가 물러 있고, 양배추 한 통이 잊혀 있고, 토마토가 맛을 잃어버린 채 버려지기도 합니다.

오래 보관하려고 만든 냉장고가 오히려 음식물 쓰레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번 강의에서는 《제로웨이스트 키친》, 《사람의 부엌》의 저자이자 ‘냉장고에서 음식을 구하라’ 프로젝트를 이어오고 있는 류지현 작가를 만나 이 질문을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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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에서 무엇을 구한다는 것

류지현 작가가 2009년부터 시작한 ‘냉장고에서 음식을 구하라’ 프로젝트에서 구하려는 것은 단순히 음식만이 아닙니다.

쓰레기로 버려지는 음식,

그 음식이 가지고 있는 맛과 영양,

그리고 식재료가 가진 색과 모양, 아름다움입니다.

냉장고 문을 닫으면 음식은 우리 눈앞에서 사라집니다. 보이지 않으면 마음에서도 멀어집니다.

작가는 양배추 하나를 식탁 위에 놓고 관찰했던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양배추의 상태를 살피게 됩니다.

‘물을 줘야 하나?’

‘조금 마른 것 같은데?’

‘이건 언제 먹어야 하지?’

음식이 눈앞에 있으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음식과 관계를 맺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생기면 쉽게 버리지 않게 됩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음식에는 저마다의 자리가 있었다

전기냉장고가 보급되기 전에도 사람들은 오랫동안 음식을 보관하며 살아왔습니다.

류지현 작가는 그 시절의 방법을 다시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것은 상온에 두고, 어떤 것은 어둡게 보관했습니다. 말리고, 소금에 절이고, 습도를 유지하거나 바람이 통하게 했습니다.

모든 식재료를 하나의 공간에 넣는 대신 각각의 식재료에 맞는 환경을 만들어준 것입니다.

가지는 따뜻한 환경을 좋아하고, 감자는 어두운 곳에서 보관합니다. 양파는 습기를 피하고, 토마토는 통풍이 중요합니다. 허브는 줄기를 물에 담가둘 수 있고, 당근 같은 뿌리채소는 수분을 유지하며 보관할 수 있습니다.

사과와 감자를 함께 보관합니다. 사과에서 나오는 에틸렌이 감자의 싹이 나는 것을 늦추는 데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이런 방법을 모두 ‘정답’처럼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오래된 생활의 지혜 가운데 과학적으로 확인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직접 실험해보고 결과를 관찰하면서 자신의 데이터를 쌓아가는 것 역시 음식을 알아가는 방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식재료의 자리를 디자인하다

이런 생각에서 탄생한 것이 ‘지식의 선반’입니다.

작가는 해외 농장과 오래된 저장 공간을 조사하면서 식재료마다 필요한 환경을 선반이라는 형태로 구현했습니다.

감자처럼 어둠이 필요한 식재료, 습도를 유지해야 하는 뿌리채소, 통풍이 필요한 채소 등 각 식재료의 특성에 따라 자리를 달리합니다.

감자와 당근을 모래 속에 보관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모래가 빛을 차단하면서 어느 정도 습도를 유지해주는 원리를 이용한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한 농가에서는 과거 마당 한쪽에 모래를 쌓아 감자를 보관했고, 아이들이 먹을 만큼 감자를 찾아오는 것이 일상의 한 장면이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낯설지만 당시에는 자연스럽고 실용적인 저장 기술이었습니다.

류지현 작가는 이런 지식을 실제 생활에서 실천하려면 때로는 ‘도구’도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변화한 주거환경에서도 오래된 저장의 지혜를 사용할 수 있도록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주는 것 역시 디자인의 역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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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를 없애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냉장고는 매우 훌륭한 기술입니다.

육류나 생선, 우유처럼 냉장 보관이 필요한 식재료도 있습니다.

문제는 모든 식재료를 습관적으로 냉장고에 넣는 것입니다.

냉장고의 온도와 습도가 모든 식재료에 좋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냉장고를 쓰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입니다.

냉장이 필요한 것은 냉장하고, 냉장고 밖에서 더 잘 보관할 수 있는 것은 그 식재료에 맞는 자리를 찾아주는 것.

냉장고에 모든 것을 맡기기 전에 음식의 특성을 한 번 더 살펴보자는 제안입니다.


자연을 통제하는 부엌에서, 자연과 연결되는 부엌으로

류지현 작가는 이탈리아의 농장들을 찾아가며 자연환경을 그대로 이용해 식재료를 보관하는 공간도 연구했습니다.

바위의 차가움과 습도를 이용한 저장 공간, 물을 이용해 자연스럽게 온도와 습도를 낮추는 저장고, 햇빛이 직접 들어오지 않도록 만든 공간.

그곳에서는 자연을 모두 막아내고 통제하기보다 이미 존재하는 환경을 이용해 음식을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도시에서는 흙과 바람, 바깥의 온도와 집 안의 생활이 점점 분리되고 있습니다. 냉장고는 그 불편함을 해결해준 아주 편리한 도구였습니다.

하지만 그 편리함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생활의 지식도 있습니다.

작가는 우리가 먹는 음식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나는 자연”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자연을 집 안으로 들인다는 것은 때로 흙도, 냄새도, 작은 벌레도 함께 만나는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불편함을 참는 것이 아니라, 그 환경을 이해하고 해결하는 방법을 다시 찾아가는 것입니다.


버려지는 것에도 다음 요리가 있다

식재료를 먹고 난 뒤에도 생각합니다.

사과 껍질로 식초를 만들고, 우려낸 녹차 잎을 말려 녹차 소금으로 만들고, 감자 껍질을 활용하고, 멸치 육수를 내고 남은 멸치도 다시 요리합니다.

우리가 지금 특별한 음식이라고 생각하는 것 가운데에는 과거 남는 식재료를 버리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음식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버리고 있는 것에서도 새로운 음식 문화가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의 ‘자투리 음식’이 50년, 100년 뒤에는 누군가에게 특별한 음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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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효도 버리지 않기 위한 기술이었다

우리는 발효를 특별한 음식이나 전문적인 기술로 생각하기 쉽지만, 발효 역시 오랫동안 식재료를 저장하고 남는 것을 다시 먹기 위해 사용해온 생활의 기술입니다.

술을 빚고 남은 술지게미를 다시 음식에 활용하고, 남은 재료를 식초로 만들고, 발효 부산물을 또 다른 음식의 재료로 사용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청국장 발효 뒤 남은 것을 식물에 활용하고, 발효액을 만들고 남은 건지를 다시 음료에 이용하는 등 “생각하면 할수록 활용하는 방법이 생긴다”는 경험이 공유됐습니다.

발효는 무언가를 새롭게 만드는 기술인 동시에, 남는 것을 다시 순환시키는 기술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이어온 저장과 발효의 방법을 다시 살펴본다면 ‘버리지 않는 부엌’의 새로운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덜 사고, 더 잘 먹는 것

아무리 잘 보관하더라도 식재료는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맛을 잃어갑니다.

그렇다면 많이 사서 오래 보관하는 것보다 좋은 것을 필요한 만큼 사고, 가장 맛있을 때 먹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참가자는 “싸게 사서 많이 사놓고 버리는 것”에서 “제대로 된 것을 소량으로 사는 것”으로 생각이 바뀌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보관법의 변화가 아니라 소비 방식의 변화입니다.

그리고 소비자의 선택이 달라지면 생산 방식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의 식재료를 원하고, 무엇을 선택하고, 어떤 생산 방식에 가치를 두는지가 쌓이면 농부와 생산자의 선택에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결국 음식물 쓰레기의 문제는 버리는 순간에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사고, 얼마나 사고, 어떻게 보관하고, 어떻게 먹을 것인가.

그 모든 과정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많이 알수록 덜 버리게 된다

“The more you know, the less you throw.”

결국 이번 강의는 냉장고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었습니다.

음식과 우리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식재료를 잘 알면 어디에 보관해야 하는지 알게 되고, 보관법을 알면 더 오래 먹을 수 있습니다.

남은 것을 활용하는 방법을 알면 버리지 않을 수 있고, 음식과 가까워질수록 쉽게 버리기 어려워집니다.

냉장고를 없애자는 것이 아닙니다.

냉장고에 모든 것을 맡기지 않는 것.

식재료마다 자기에게 맞는 자리를 찾아주는 것.

남은 음식과 부산물을 한 번 더 바라보는 것.

그리고 우리가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저장과 발효의 지혜를 다시 찾아보는 것.

어쩌면 제로웨이스트 키친의 시작은 새로운 제품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오늘 냉장고 문을 열고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제대로 바라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류지현 작가는 강의를 마치며 거창하게 부엌 전체를 바꾸기보다 집에 있는 채소 하나부터 시작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그 채소가 어떤 환경을 좋아하는지 찾아보고, 하루하루 어떻게 달라지는지 관찰하고, 직접 보관해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우리가 일상에서 가장 가까이 만나는 자연입니다.

그러니 자연과 가까워지는 일을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 부엌에 있는 식재료 하나를 조금 더 오래 바라보고, 조금 더 알아가고, 평소와 조금 다르게 보관해보는 것.

많이 알수록 덜 버리게 되고,

가까이 둘수록 더 소중하게 됩니다.

이번 주에는 여러분도

냉장고에서 식재료 하나를 구해보면 어떨까요?

그 작은 실험에서

‘버리지 않는 부엌’이 시작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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